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셰놀 귀네슈 (문단 편집) === [[FC 서울]] 감독 === 그렇게 트라브존스포르에서 경질된 뒤 약 2년동안 휴식을 취하던 귀네슈는 2006년 12월 K리그의 [[FC서울]] 감독으로 부임해 2007 시즌부터 2009 시즌까지 총 3시즌 동안 FC 서울 감독을 지냈다. 당시부터 지금까지도 '''역대 K리그 감독들 중에선 감독 커리어가 가장 화려한 인물이었기 때문에''' 큰 화제를 모았다.[* 이 당시 챔피언십 결승에 나온 독일인 심판이 귀네슈 감독을 알아보고 깜짝 놀랐다고 한다. UEFA 올해의 팀을 수상했던 이 사람이 한국에 있을 줄 전혀 몰랐다고 한다. 여담으로 이 심판은 펠릭스 브리히라는 심판으로 키슬링의 유령골이 나온 경기와 UEFA 챔피언스리그 결승 주심, [[레알 마드리드]]와 [[맨체스터 시티]]의 챔피언스리그 16강 등 여러 굵직한 경기의 주심을 맡기도 했다.] 감독으로서의 역량은 뛰어났지만, [[어그로]]를 끌어 내부를 단결시키는 유럽식 언플을 많이 해서 안티들에게 입네슈라고 조롱을 받았다. 심판판정 항의만 해도 2010년 들어 국내파 감독들이 훨씬 더 심하게 돌아가면서 했다. 2007년 처음 등장했을 때 기존 K리그 감독들의 교과서적인 멘트와 달리, 흥미로운 멘트를 던지는 인물이었다. "우리 팀은 우승을 위한 팀, 우리 팀 정도면 [[트레블|모든 대회 우승을 노려야 한다.]]" 등등이 바로 그것들이었다. [[차범근]] 감독이 이끌던 호화군단 수원 삼성을 2007년 3월 4:1로 대파하며 이목을 끄는데, 4월에는 수원 삼성에 홈에서 0:1로 패하며 호각세를 이룬다. 차범근 감독도 귀네슈 특유의 언플에 화답하며 이 때를 기점으로 수원 삼성과 FC 서울은 [[슈퍼매치|완벽한 숙적으로 자리잡았고,]] 이는 K리그의 흥행에도 큰 기여를 했다. 하지만 2009 피스컵 코리아 대회 4강전에서 '''FC 서울 선수들이 괜히 심판에게 항의하다 단체로 퇴장당하고'''[* 이전에 포항은 김형일이 퇴장당했으나 별다른 항의가 없었고, 이미 경기는 3:2로 뒤집어졌으나 추스려서 연장까지 끌고 갈 수 있는 상황. 그러나 처음 퇴장당한 선수 이후 추가로 심판에게 항의하고 포항 선수에게 머리박기를 하는 꼴사나운 장면 끝에 결국 김치우와 김치곤 2명이 퇴장당해 전세가 역전되어 버렸다.] 포항에 5:2로 쳐발린 다음에 말한 '친한 감독 3명이면 우승가능', '야구나 보지 뭐하러 K리그 보나'로 돌출발언이 절정을 이룬다. 비록 컵 대회에선 포항에 대패하긴 했으나 이 때가 (2009. 08. 27) 서울이 정규리그에선 1위를 달리던 시점인 데다, 하필 상대였던 [[포항 스틸러스]]가 스틸러스 웨이로 깔끔한 경기 매너를 지키려 노력하고 있다는 점에서 상대팀 감독 [[세르지오 파리아스|파리아스]]와 대비되면서 더욱 혹독히 비난 받았다. 물론 누가 진짜 더 뛰어난 감독이었는지는 이후 커리어가 증명해줬다. 감독 역량은 나쁘지 않은데, 그 놈의 FC 서울 선수들의 공대 기질 때문에 여러 모로 도매금으로 까였다. 감독 본인도 뒤에선 선수들 많이 혼내곤 한다는데, 선수단 내에서 중심을 잡고 분위기를 제대로 조성해줘야 할 [[김한윤]], [[이을용]] 같은 고참급들이 되려 앞장서서 날뛰는 통에(...) 감독 혼자 힘으론 한계가 있었다. 결국 이 문제는 귀네슈가 떠나고 후임으로 빙가다 감독이 부임한 2010년에 베테랑 선수들을 대대적으로 수혈하면서 해결되었다. FC 서울에서 보여준 매력적인 축구나 K리그 전후로 쌓은 커리어에서 알 수 있듯 충분히 뛰어난 감독이었으나, '''K리그에서 우승컵을 반드시 한 번은 들고 고국으로 돌아가겠다'''는 목표는 결국 이루지 못했다. 2009년 계약 만료인데 처음 3년 계약 당시 2+1(옵션 계약)으로 2009년엔 가족의 반대를 무릅쓰고 계약을 했는데 결국 아무 타이틀도 얻지 못한 것이다. 결국 2009년 리그를 마지막으로 FC 서울과 계약 만료. 재계약을 하지 않겠다고 밝힘으로서 3년 간의 K리그 생활을 마무리 짓게 되었다. 떠나면서 '''솔직하지 못하면 이기적인 사람'''이라는 말을 남겼다. 3년간 FC 서울을 맡으면서 선수 조련과 전술적인 면에서 그 성과를 부정할 수 없으나, 결국 선수들의 멘탈을 잡지 못했다는 점과 여러가지 악재가 겹치면서 우승컵을 들어올리지 못했다는 점에서 K리그를 거쳐간 비운의 외국인 감독 중 한 명으로 남았다. 하지만 성과도 많았다. [[이장수]] 시절의 투박한 축구에서 벗어나 '''서울의 컬러가 된 빠른 템포와 패싱을 골자로 하는 공격 축구를 정립시켰고 [[이청용]]과 [[기성용]]처럼 서울의 자랑이 된 젊은 선수들을 발굴한 성과들 덕분에''' 10년이 지난 지금도 귀네슈 감독에 대한 서울 팬들의 지지도는 절대적이다. 재임 기간에 트로피는 하나도 없었음에도 서울은 이 시기를 기점으로 탄탄한 기반의 인기구단으로 떠올랐다. [* 이전에는 박주영 등 스타 마케팅을 활용한 반짝 인기 성격이 강했다.] [[한동원]], [[송진형]], [[고명진(축구선수)|고명진]], [[김동석(축구선수)|김동석]] 같은 다른 유망주들보다 [[존재감]]이 없었던 이청용을 '''[[국가대표]]에 승선 가능한 재능'''이라 평하며 중용해 능력을 꽃 피울 수 있도록 도왔으며, 기성용 역시 귀네슈 취임 후 중용되었다. 귀네슈 감독의 재직 시절 이청용, 기성용, 박주영 등이 유럽 리그로 진출했고 2010년 월드컵 원정 16강의 주역이 된다. 서울 역시 후임으로 온 [[넬루 빙가다]] 감독이 귀네슈의 유산을 기반으로 단점을 보완하며, 시즌 내내 압도적인 경기력을 보이며 마침내 우승컵을 들어올릴 수 있었다. 선수단 운영에 있어선 자율을 많이 부여하고 마찰이 있어도 너그럽게 대처하는 편이었다. 이런 성향은 그의 밑에서 지도자 경험을 쌓은 [[최용수]] 감독에게도 영향을 미쳐 최용수 감독은 젊은 지도자들 중에서도 상당히 널널한 스타일로 유명했다.[* 최용수 감독 스스로 감정 추스리고 선수들 대하는 법에 대해 많이 배웠다고 언급한 바 있다.] 다소 강압적인 편이었던 이장수 시절보다 화기애애해지고 젊은 선수들이 치고 올라올 수 있게 하는 장점이 있었으나 젊은 선수들의 멘탈 통제가 제대로 안되었던 단점도 존재했다. 다만 훈련 강도는 엄청 빡셌다고 한다. [[김병지]] 선수는 본인이 만난 감독 중에서 가장 훈련을 빡세게 시킨 감독이었다고 회고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